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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부정공>통정대부명능참봉운파공휘용환행장(通政大夫明陵參奉雲坡公諱龍煥行狀)
通政大夫明陵參奉雲坡公諱龍煥行狀 先王考府君諱龍煥字永魯號雲坡號也系出玉川以高麗大將軍諱璋爲鼻祖屢傳至諱元吉策勳官大匡輔國封玉川府院君諡忠獻號農隱與圃牧陶冶幷稱五隱生諱瑜號虔谷時喪紀壞廢遵三年鼎革守罔僕義故我 世宗朝有前副正之表閭 肅宗時鄕人建祠諱斯文 贈吏曹參議諱智崙察訪四昆季友愛篤摯相好有亭諱淑珪亦察訪聿修祖德克守先亭其後至諱完寶有至行金承宣寗漢撰碣公五世以上也高祖諱洪耘 贈通訓大夫司僕寺正曾祖諱光表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祖諱錫源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考諱秉益號龍庵以大耋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前妣貞夫人平山申氏旡育繼妣貞夫人竹山安氏諱洙贊女 哲宗己未八月十六日生公幼而岐嶷及長廣顙豊頤髭髥美氣宇英爽性度寬厚嚴明好學居家著孝友處鄕有惠愛幹局恢洪優爲需世而重義急難綜物斷事爲人推服年甚貧而事親母有傷哉之嘆曰若使吾親修瀡可給則身雖爲抱闕擊枡吾豈辭諸間有以官職往出膺洙手捀公治副衆望士民慕誦由是菽水稍舒遭喪後不之復爲曰曩日之屈其非爲親故耶喪祭無憾哀慕如袒括時逍遙林野未展蘊抱致力稼穡以勤儉立法開塾延師訓兒孫課經史九思九容揭諸壁夙夜警箴及中身家業漸膄凡義所可爲則不以樹立之辛苦吝其施用之闊略戊己之際艱虞溢目會家衆焚數千金債卷多助婚葬未能者示不復理財意也殫追遠誠自考至先壟未及石之者次第竪爲表銘宿德庚戌屋社之燮時倅一鄕士望者怯以薙髪爲能事請公慫慂劫欲行薙憤罵嚴拒使不敢近犯罹倭將搆執勒薙之禍却食三日長吁曰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毀傷先王制禮衣冠寧死不免夜着綱正冠示其不薙之義言幸峻毅節義雅望反爲敬服終不再犯 高宗己丑筮仕將仕郞陞除通政大夫明陵參奉此其儻來也終不汲汲進就後癸亥七月三十日終于寢享年六十五葬于順天住巖面住巖洞龍田後麓丁坐原配淑夫人慶州金氏諱元集其考事舅甚順佐夫子立家計聰敏絶倫擧三男二女伯基昊仲基暢季基碩朴魯昌張在洙婿也孫學鍾敏鍾星鍾相鍾英鍾長房生仁鍾順鍾信鍾次房生貴鍾三房生曾玄不盡錄竊伏惟自王考府君下世以來寰宇大勤天飜而地覆之嗚呼當日徽範懿行將安所托而傳後耶家君爲是以懼方琢貞珉表阡道命不肖述事行不肖嘗聞程夫子訓矣畵工肖人一髭髮不猶便是別人第念事行本非髭髮之外也亦非髭髮之微也敢存一辭溢美使吾先祖考累別人譏邪兢兢執簡槩以叙次逮事時心目所記者如玆立言君子庶有考焉 丁卯三月上澣 不肖孫 學鍾 謹述 통정대부명능참봉운파공휘용환행장(通政大夫明陵參奉雲坡公諱龍煥行狀) 선왕고 부군의 휘는 용환이요. 자는 영로(永魯)며 운파는 그의 호요. 옥천조씨인데 고려 대장군 휘 장을 상조로 한다. 三전하여 휘 원길은 정책 훈공으로 벼슬이 대광보국 옥천부원군에 시호는 충헌이요. 호는 농은이며, 포은, 야은, 도은과 더불어 오은(五隱)이라 칭하였다. 생휘 유는 호가 건곡인데 때에 상기가 무너져 백일 탈상을 하였는데, 홀로 三년 시묘하고 고려가 망함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절의를 지켰으므로, 세종조에서 전부정이라 정포하고, 숙종조때 고을 사람이 사우를 세워 향사하였으며, 휘 사문(斯文)은 증이조 참의요. 휘 지륜(智崙)은 찰방으로 四형제가 우애 독실하여 상호정을 세워 주소 담락하였고, 휘 숙규(淑珪) 또한 찰방으로 드디어 선덕을 이어 능히, 선정을 지켰으며 그 후손 휘 완보(完寶)는 지극한 행의가 있어 승지(承旨) 김영한(金寗漢)이 갈명을 찬하였으니 공의 五세 이상이다. 고조 휘 홍운(洪耘)은 증통훈대부 사복시정이요. 증조 휘 광표는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며, 조 휘 석원(錫源)은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겸 동지 의금부사요. 고휘 병익(秉益)의 호는 용암(龍庵)인데 수직으로 가선대부, 동지 중추부사를 제수 받았으며 전비는 정부인 평산신씨(貞夫人平山申氏)로 소생이 없고 계비 정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는 수찬(洙贊)의 따님이었다. 철종 기미(己未)(一八五九)년 八월 十六일에 공을 출생하였는데 어릴때부터 재능이 뛰어나더니 장성하매 이마가 넓어지고 턱이 풍후하며 수염이 아름답고 기량이 영명하며 성도가 관후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가정에서는 효우를 밝히고 향당에서는 은혜가 있으며 넓고 큰 국량은 세상에서 쓰일 재목이요. 의리를 중히 여기고, 남주기를 좋아하며 처사에 명석하니 세상이 추중한 바 되었다. 초년에 심히 가난하므로 매양 슬피탄식하여, 말하기를 『만일 우리 어버이께 쌀죽을 공급할지면, 비록 문지기와 야겅군이 될지라도 내어찌 사양하겠는가』 간간이 관직으로 출사하여 성실히 복무하고 중망을 얻으니 사민이 앙모하였다. 이로부터 부모 봉양할 자산이 조금 저축되었는데 상을 당한 뒤에는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말하기를 『전일에 뜻을 굽히고 벼슬한 것은 어버이를 위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 초상 제사에 유감이 없이 하고 슬피 사모하기를 초상 때 같이 하였다. 임천에 노닐며, 쌓인 포부를 펴지 못하고 농사에 힘을 다하여 근검으로 가규를 세우고 서당을 설립하여 스승을 맞아 들여 아손을 가르치고 경사를 시험하며 구사규용(九思九容)을 모든 벽에 걸고 주야로 경계하고 중년에 가산이 점차 풍요하니 대범 옳은 일은 어렵게 모았다하여 쓰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무기지년(戊己之年)에 어려운 근심이 눈에 넘치니 가족을 불러 수천금 채권을 불사르고 혼인과 장례를 치르지 못한자를 많이 도운 것은 다시 재물을 모을 뜻이 없음을 보인 것이다. 선영에 정성을 다하여 선고 이상 선산에 석물 없는 것을 차례로 비석을 세워 큰 덕을 새겨 표하였다. 경술(庚戌) 합방후에 당시 성주와 고을 망사란 자가 위협하여 머리깎기를 능사로 하여 공을 청하여 회유하고 삭발코져 하니 무섭게 꾸짖고 엄히 거절하여 감히 범치 못하게 하였으나 결국 왜장에게 붙들려 억지로 화를 당하고 三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길이 탄식하되 『신체 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 감히 훼상치 못한것은 선왕의 정녕 한 고계이니, 의관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패치 못하겠다.』 하고는 망건쓰고 관을 바르게 하여, 삭발 아니한 뜻을 보이며 말과 행동이 높고 굳세며, 절의가 고결하니 도리여 경복하고, 마침내 두번 다시 범치 못하였다. 고종 기축(己丑)(一八八九)년에 처음 출사하여 장사랑(將仕郞)으로 통정대부명릉 참봉에 승진한 것은 탁이(卓異)함으로 준것이요. 마침내 서둘러 진취한 것이 아니었다. 계해년 七월 三十일에 향년 六十五세로 별세하니, 순천 주암면 주암동 용전후록 정좌원(住巖面住巖洞龍田後麓丁坐)에 안장하고 배 숙부인(淑夫人)은 경주김씨(慶州金氏) 원집(元集)의 딸로 시부모를 섬기고 군자를 도와 가산을 이루며, 총민이 절륜하였다. 아들은 기호(基昊) 기창(基暢) 기석(基碩)이요. 딸은 박노창(朴魯昌) 장재수(張在洙) 부인이며 손자 학종(學鍾) 민종(敏鍾) 성종(星鍾) 상종(相鍾) 영종(英鍾)은 큰아들 소생이요 인종(仁鍾) 순종(順鍾) 신종(信鍾)은 둘째 아들 소생이며, 귀종(貴鐘)은 셋째 아들 소생이요 증손, 현손은 다 기록치 아니한다. 그윽히 생각하니 왕구부군이 별세하신 뒤로부터 천지가 크게 움직여 번복이 되었으니 슬프고 한스럽도다. 당일 아름다운 규범과 착한 행의를 장차 누구에게 부탁하여, 후세에 전할 것인가. 가군(家君)이 이를 두려워하여 바야흐로 곧은 돌을 갈아 묘도에 표하고 불초에게 사행을 기술하라 명하니, 불초가 일찍 정부자(程夫子)의 교훈을 들은지라, 그림 그린 화공이 사람을 그리면서 수염하나 머리카락 하나가 같지 아니 하여도 문득 다른 사람이 된다 하였다. 이제 생각하니 사행이 본시 수염과 머리카락만이 있는 것이 아니요 또 수염과 머리카락 같이 가는 것이 아닐진데 감히 허언을 꾸며 우리 선조고로 하여금 별 사람이 되었다는 조소를 듣게 하겠는가. 조심조심 붓을 잡아 당시의 마음과 눈으로 겸문한 바를 서술하여 바른 말을 하는 군자의 고찰을 바란다. 불초손(不肖孫) 학종(學鍾)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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